생체 시계 거꾸로 돌리고 싶은 인류의 염원, 과연 현실화할까
지난 8월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생명과학과 정원석 교수팀은 노화된 뇌에서 발생하는 비정상적 별아교세포(astrocyte)가 알츠하이머의 원인이 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국제적 학술지인 ‘네이처 에이징(Nature Aging)’에 게재했다. 별아교세포는 뻗어 있는 많은 돌기 때문에 별처럼 보이는 신경 아교세포(신경세포 사이를 메우면서 영양물질을 공급하는 세포)로, 뇌와 척수에 주로 존재한다. 정 교수팀이 발견한 별아교세포는 기존에 밝혀진 것들과는 다른 종류인데, 특이하게도 뇌에서 단기 기억을 저장한다고 알려진 해마에서만 발견됐다. 학계에선 이 세포의 발견이 알츠하이머 치료에 또 다른 돌파구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엔 알츠하이머 외에도 노화와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인류가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라 여겼던 노화를 정복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장밋빛 전망도 나오고 있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 질병 분류’에 노화를 포함시켰다. 노화를 신체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닌 질병으로 본다면, 노화 자체가 치료 대상이 된다. 노화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이런 인식의 전환에 불을 지핀 것은 2020년 출간된 ‘노화의 종말(원제 Lifespan: Why We Age and Why We Don’t Have To)’이라는 책이다. 하버드대 의대에서 30년간 노화와 유전을 연구한 저자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는 “노화는 질병이며, 다른 여러 질병과 마찬가지로 노화 역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싱클레어 교수에 따르면, 노화의 비밀을 쥐고 있는 열쇠는 우리 염색체에 있는 텔로미어(telomere·말단 소체)라는 DNA 입자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부분을 감싸는 골무 모양인데, 세포 분화를 하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길이가 점점 짧아진다. 다시 말해 텔로미어가 짧아지면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텔로미어의 길이를 계속 길게 유지할 수 있다면, 노화 방지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텔로미어의 길이를 늘여준다고 알려진 텔로메라아제(telomerase) 효소를 통해 텔로미어의 길이를 늘이려는 여러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이 밖에도 생체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위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미국 솔크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의 후안 카를로스 이즈피수아 벨몬테 교수와 바이오 기업 제넨텍(Genentech)의 하인리히 야스퍼 박사는 올해 3월 “건강한 중년 생쥐에게 세포 역분화를 장기간 시도해 피부와 장기를 젊은 생쥐 같은 상태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네이처 에이징’에 실었다. 역분화는 말 그대로 세포의 생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방법이다. 늙은 세포를 젊은 세포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분화가 잘못되면 세포 분열이 멈추지 않아 암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일부에선 노화 세포만 선택적으로 골라 죽이는 시도도 하고 있다. 작년 12월 일본 준텐도대 의대의 미나미노 도루 교수 연구팀은 백신을 주입해 노화 세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화장품 업계 등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항노화 수단으로 각광받은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 역시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는 쥐의 피부 세포에 네 가지 유전자 조절 단백질을 주입해 노화 세포를 배아줄기세포(인체의 모든 세포로 자라나는 원시세포) 상태로 되돌린 공로로 2012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후 그의 이름을 딴 단백질 ‘야마나카 인자’와 이 유전자를 주입해 만든 ‘유도만능 줄기세포(IPS)’를 바탕으로 노화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들이 하나씩 나오고 있다. IPS는 배아줄기세포와 비슷한 분화 능력을 지닌 데다, 수정란에서 분리한 배아줄기세포와 달리 수정란이나 난자를 사용하지 않아 윤리적 문제에서도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노화에 대한 인식 변화에 발맞춰 최근 몇 년간 이른바 ‘회춘 산업’에 뛰어든 기업도 적지 않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알토스 랩(Altos Labs)’은 장기와 세포의 생체 시계를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올해 1월 공식 출범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를 비롯한 여러 억만장자도 야마나카 교수, 이주피수아 벨몬테 교수 등 노화 분야 석학을 대거 자문위원으로 보유한 알토스 랩에 이미 투자를 결정했다.
구글이 자회사로 설립한 노화 방지 연구 기관 ‘캘리코(Calico)’는 노화의 근본 원인을 규명해 인간 수명을 500세까지 연장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페이팔 공동 창업자 피터 틸이 투자한 스타트업 ‘유니티 바이오테크놀로지(Unity Biotechnology)’는 노화 세포를 제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체내에 노화 세포가 쌓이면 신체 조직 재생 능력이 저하되고, 결국 심장병이나 암, 알츠하이머 등 노화와 관련한 질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삼성 등 대기업과 여러 생명공학 벤처기업들이 ‘회춘 산업’에 뛰어들었다. 시장 조사 기관인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글로벌 항노화 시장은 2020년 585억달러(약 81조5841억원)에서 2025년에는 824억달러(약 114조8985억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연구들이 결실을 맺는다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인류의 염원이 과연 현실화될까. 만약 노화가 치료 가능한 질병이 되는 시대가 온다면 기존의 헬스케어와 노인 복지 등은 어떻게 변화하고, 나이 듦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은 어떻게 바뀔까.
WHO에 따르면 전 세계 60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15년 12%에서 2050년 거의 두 배 수준인 22%로 높아진다. 65세 이상 고령화 인구가 연평균 3.3%씩 증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보이고 있는 한국은 특히 노화가 중요한 사회 이슈다. ‘이코노미조선’이 ‘노화와의 전쟁’을 기획한 이유다.
Keyword 텔로미어(telomere) 염색체 말단 부분으로, 염색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어로 끝을 뜻하는 ‘텔로스(telos)’와 ‘부분’을 뜻하는 ‘메로스(meros)’라는 단어를 따서 ‘텔로미어’라는 이름이 붙었다. 텔로미어는 세포가 분열할수록 짧아져 시간이 지나면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생체 시계’라고도 불린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면 노화와 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암은 텔로미어가 영원히 줄지 않는 예외적인 세포다. 암세포에는 텔로미어의 유지를 돕는 텔로메라아제(telomerase)라는 효소가 활성화돼 있어 암세포가 영원히 증식을 거듭할 수 있게 한다. |
plus point 모든 생명체가 늙는다? “No, 늙지 않는 동물도 존재” 흔히들 ‘생로병사’는 모든 생물체가 겪어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생태계에는 실제로 늙지 않는 동물도 존재한다. 바로 아프리카에 사는 땅속 동물 벌거숭이두더지쥐(naked mole rat)다. 몸길이 8㎝에 털이 없는 이 동물은 생태계 거의 모든 동물에 해당되는 ‘곰퍼츠의 사망률 법칙(고령일수록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내용)’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구글의 계열사로, 비밀리에 인간 수명 프로젝트를 진행한 실리콘밸리 벤처기업 ‘캘리코’의 연구진은 2018년 “벌거숭이두더지쥐는 평생에 걸쳐 노화 징후가 거의 없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장수와 노화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이는 캘리코 연구진의 벌거숭이두더지쥐 생물학적 메커니즘 연구는 생명과학·의학 분야 오픈 액세스 저널 ‘이라이프(eLife)’에 실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최대 수명이 100세인 바닷가재는 스스로 텔로미어를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살아 있는 동안 거의 노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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